아래 내용은 예시로 작성해본 저의 물건들 이야기입니다. 신청하실때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필름카메라조차 고가이던 지난시절, 사람들은 카메라가 필요하면 사진관에서 대여를 해서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진관에서 단골로 취급되어진 카메라가 올림푸스 펜 시리즈의 소형필름카메라였습니다. 지금 봐도 작고 앙증맞은 저 필름카메라는 35mm필름을 넣으면 필름컷수가 두배로 뻥튀기되어 사진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필름값은 그리 저렴한느낌은 아니었기에 아마도 저 필름카메라는 매우 대중적인 카메라의 위치에 있었던것 같습니다. 중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내손에 저 카메라가 들어왔고 저는 필름한통 넣고 생애 처음으로 제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제인생에 첫번째 카메라, 첫번째 사진이었습니다. 그때 촬영한 사진중에 한컷을 대학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제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동네 좁은 골목길에 나와 담벼락에 기대있던 내복차림의 어린소녀를 하이앵글로 위에서 촬영한 흑백사진이었는데 아직도 그 사진안에 아이얼굴과 인화되 나왔던 느낌의 이미지가 생생합니다. 나의 첫번째 최애 사진이었습니다. 비록 그 사진이 제게는 지금 없지만, 그 순간은 제 머릿속에 그대로 입니다. 아쉽지만 저 카메라 또한 그때 그 카메라는 아닙니다. 어느날 벼룩시장 바닥에 누어있던 고장난 소품카메라를 얼마안되는 가격으로 구입한겁니다. 과거의 시간을 소환해준 카메라입니다. 지금사용하고 있는 고가의 디지털카메라와 비교 할 수는 없지만 저 친구역시 나를 사진과 만나게 해준 고마운 친구입니다.
해가 바뀔때마다 우리는 매번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들을 꺼내보고는 합니다. 저 역시도 그런 리스트들중에 악기 배워 보기가 항상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시절입니다. 음악시간에 한가지씩 악기를 준비 해와라 했을때 그때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문방구에서 그나마 저렴하게 파는 캐스터넷츠, 트라이앵글, 피리 이런것들을 사가지고 갔었습니다. 하지만 좀 사는집 애들은 반에 한 두명 정도 하모니카를 가지고 왔었습니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한번만 불어 보자고 그 친구를 꼬드겼었습니다. 하지만 입을 밀착하는 하모니카 특성상 잘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는 그냥 듣기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저너머 만질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렇게 악기에 관한 기억이 남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르고 지금으로부터 7년전입니다. 용산역 근처 지하 작업실에서 새해를 맞던 그 무렵쯤, 저는 드디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바이올린 강사를 연결해주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앳되 보이는 대학생 한명을 소개 받고 일주일에 두시간정도, 한달에 네번 받는 바이올린 강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산 10만원짜리 연습용 바이올린을 한대 구입해서 시작한 저의 바이올린은 그렇게 7년여가 지났습니다. 형편상 몇달 받지 못한 강습이었지만, 선생님의 조언으로 하루 한시간 꾸준한 연습을 7년 동안 빠뜨리지 않고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사진속 바이올린은 그 뒤 큰맘 먹고 바꾼 두번째 바이올린입니다. 몇백만원씩 하는 수제 바이올린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게는 무엇보다 값나가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아직도 동요와 가요등 몇곡정도만을 어설프게 켜고 있지만, 하루 한시간 정도 매일 왼쪽어깨위에 걸치고 혼자서 온갖 폼을 다 잡아 봅니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연주라고 저는 스스로를 응원하며, 길거리 사람들앞에서 나도 바이올린 버스킹을 하는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속에 저 친구와 앞으로도 늘 함께 있을겁니다.
언제 부턴가 기도하는 저 성모상이 제 책상 모니터 뒤에서 저와 매일 함께 합니다. 그녀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하루를 보낼때도 많지만, 저녁무렵 해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노란백열등을 켜면 따뜻한 백열등아래 놓여 있는 그녀를 한참은 멍하니 바라 볼 때가 많습니다. 고개 숙인채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이 항상 제게 무언의 응원을 해 주는 듯 합니다. 그녀는 동묘 주말벼룩시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깨지는것이 염려스러웠던지 길가에 깔아 놓은 천 위에 다른 여러 중고 물건들과 함께 섞여 누어 있었습니다. 누렇게 변색되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채로 조용히 누어 있던 그녀를 만났고 저는 약간은 바가지를 쓰는 느낌의 비용으로 구입해서 지금의 책상위에 그녀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의 작업실 이사가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조심스럽게 안아서 특별대우를 해 주며 지금까지 제 옆에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지만, 그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책상앞에서 담배를 많이 피워대는 것이 그녀에게 가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녀는 웬지 모든것을 이해해 줄것만 같습니다.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이 오면 한국의 작가로서 항상 수상후보에 오를만큼 우리문학계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계시는 노작가 고은 선생님이 계십니다. 미투운동바람에 사람들 구설수에도 오르내리시긴 했지만 그래도 그분의 시집 만인보는 문학이전에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사람책이라 할 수 있을것입니다. 시집 "만인보"는 말 그대로 시인이 겪어 온 시간속에서 만나거나 스쳐온 사람 한명 한명을 시로 엮은 것입니다. 만명을 다 채우고 시집을 완간하시지는 못했지만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오랜시간에 걸친 대작임은 분명합니다. 나만의 작업을 해보겠다며, 나의 작업을 시작하면서 어느날 시집 만인보를 떠올렸고 누군가는 시로 만명을 써 내려갔다면 나는 사진으로 만명을 기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선 사람들 또는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 서너명과 함께 이야기하듯 사진촬영을 해나갑니다.
처음 촬영은 어찌하면 좋을가 여러생각들을 해가며 헤매기도 했지만 지금은 횟수를 거듭하며 이런저런 나만의 방법으로 그 들을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한번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얼굴이 있습니다. 내앞에 있는 상대방은 나를 볼 수 있지만 정작 나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를닦을때 거울앞 내모습, 화장할때 거울에 비친 무표정한 내모습을 기억하는것이 전부입니다. 분명 한개의 얼굴이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아빠의 얼굴, 아들의 얼굴, 회사부장님의 얼굴, 친구의 얼굴 등 여러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명의사진은 그렇게 그들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게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만명을 채우는것은 거의 불가능한일 일것입니다. 하지만 한명한명 사람들을 만날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만나지 못한 자신의 얼굴을 사진한장으로 기록해줄것입니다. 저 사진의 보드안에 겹겹이 사람들의 이야기로 쌓여가는 것을 보며, 지나온 나의 시간, 현재의 나, 다가올 시간을 살아갈 나를 계속해서 만나고 생각하게 될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채도가 뚜렷한 컬러의 저 셔츠를 즐겨입었습니다. 너무 자주 이 셔츠만 입은 탓이었는지 숄더백을 매는 왼쪽 어깨부분이 닳아서 헤어질만큼 입었습니다. 헤어진 자욱때문인지 지금은 헹거에 잘 모셔 놓고 있습니다. 같은 컬러의 같은 스타일의 똑같은 것을 찾아 보려 해당 브랜드 매장에 가끔 들러 보지만 같은 옷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가 좋아하는 셔츠가 되었습니다. 비록 왼쪽 어깨쪽은 볼품 없게 헤어 졌지만 아직도 제게는 최애(最愛) 셔츠입니다. 좋은날엔 누가 뭐래도 저 셔츠를 다시 입을수밖에 없습니다.